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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블드 | 12:41 | 추천 27 | 조회 0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고 바뀐 것 +3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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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에 벼락이 떨어지고 바뀐 것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고 바뀐 것_1.webp




중종 8년 2월 28일 기사



크게 뇌성 번개가 일어 태묘(종묘)의 소나무 두 그루에 벼락이 떨어졌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종묘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졌는데




중종 8년 3월 2일 기사에 따르면



종묘에 친제를 마친 중종이 입시한 신하들을 모아놓고



"묘정에 벼락이 쳐서 몹시 놀랐다. 천변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경 등은 각각 소회를 말하라."



라며 신하들에게 각각 속에 담아두었던 직설을 풀어내어 보라고 명하였다.



이 시기는 사실 왕조의 정통성 면에서 상당히 민감한 시기였는데



바로 문종의 정비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신원을 회복하고 다시 종묘에 부묘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의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고 바뀐 것_2.webp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 단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인해 1달 만에 숨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고작 24살이었다.



며느리의 이른 죽음에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조차 육식을 거부하고 침통해 했고



원손을 낳은 아내를 잃은 문종(당시엔 세자) 또한 큰 충격을 받고는 다시 정비를 들이지 않았다.



이후 문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현덕빈에서 현덕왕후로 추존하였고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인효순혜라는 존호를 붙여 인효순혜현덕왕후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계유정난 이후에 발생하게 된다.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고 바뀐 것_3.webp






계유정난 이후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성삼문 등을 주축으로 한 단종복위운동이었다.



김질 등의 밀고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성삼문을 비롯한 연루자들이 줄줄이 잡혀와 문초를 당하는 와중



죽은 현덕왕후의 동생이자 단종의 외삼촌인 권자신 또한 가담했음이 밝혀진다.



또한 여기에 현덕왕후의 어머니인 해주 최씨도 연루되어



어머니 해주 최씨와 권자신이 처형당하고



이미 죽은 아버지 권전 또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단종도 이에 연루되어 노산군으로 강봉되었다.




이후 세조 3년 3월 의금부에서



"현덕왕후 권씨의 어미와 그 동생은 주살되었고 아비 권전은 서인으로 만들었으며, 아들 노산군은 종사에 죄를 지어 군으로 강봉하였는데


현덕왕후의 명위를 보존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며 서인으로 폐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를 세조가 받아들이며 현덕왕후는 서인이 되고 종묘에 부묘된 신위도 철거되었다.




심지어 세조 이후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에 받은 교명까지 불태워버리기까지 하는데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은 현덕왕후의 신원을 회복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고 바뀐 것_4.webp




이후 세조의 증손자인 중종 대에서 다시금 현덕왕후의 복위 문제가 언급되는데



현덕왕후를 다시금 복위하는 문제에 대하여 무려 5개월 이상 신하들 간의 의견 대립이 진행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여론이 수렴되기 시작하는데



왕비 본인이 역모(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는가) : X


왕비 본인이 역모 중에 살아 있었는가 : X


왕비 사후에 발생한 가족의 역모로 연좌를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 △ → X



로 암만 그래도 현덕왕후를 서인으로 강등하고 종묘에서 신위를 철거한 것은 너무한 처사라는 데에 의견이 모인다.



그러던 와중 종묘의 소나무에 벼락이 떨어졌고



호조판서 장순손을 비롯한 영중추부사 김응기, 이조판서 김전, 형조판서 박열 등 여러 신료들이 입을 모아서



소릉(현덕왕후의 묘)을 추복하고 문종대왕의 신위 옆으로 현덕왕후의 신위를 다시 부묘하라는 열성조의 뜻으로 해석된다고 의견을 밝힌다.



또한 종묘에 혼인한 문종대왕의 신위가 홀로 부묘된 것은 유교적 질서에 맞지 않다는 의견도 함께 한다.








중종(조선) - 나무위키


중종 8년 3월



신하들의 의견이 모였음을 확인한 중종은



현덕왕후의 묘를 추복하자는 것이 모두 정의에 합당하며



처음부터 추복함이 인정에 맞다는 것을 알았지만 독단으로 임금이 결정할 수 없어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하길 기다렸다고 밝힌 후



예에 맞도록 현덕왕후의 묘를 추복하고 현덕왕후의 신원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이때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현덕왕후의 묘를 이장해 문종이 묻힌 현릉 곁으로 옮기게 되었다.





사실 조선 초기의 과거사를 정리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숙종 대에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에 정종과 단종의 신원을 회복시켰으며


소현세자의 아들, 민회빈 강씨, 사육신, 이방번과 이방석 등도 신원이 복권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덕왕후의 신원은 이른 시기인 중종대에서 회복되었는데



이미 죽은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신위를 철거하는 등의 만행이 당대 기준으로도 무리수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고 바뀐 것_6.webp



??? : 십색기들아(벼락을 치며) 내가 어떻게 혼인한 아내인데 죽은 이후에도 홀애비 만들래? 수양 후손 새1끼들 아니랄까봐



TMI) 문종은 두 번이나 폐빈을 한 끝에야 현덕왕후를 만나 온전한 혼인생활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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