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28일 오후 4시30분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들은 경악했다.
하얀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여성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타당해 터지고 붓고
찢어져 있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였는데, 바닥에 흥건히 고이고 말라붙은
검붉은 액체는 피가 분명해 보였다.
더 끔찍한 것은, 이미 사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나 보이는 고인의 시신이 끔찍하게 유린되고
훼손당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시신의 성기에는
유리 음료수 병이 박혀 있었고, 항문에는 철제
우산대가 깊이 꽂혀 있었다.
나중에 시신 부검 과정에서 시신의 성기 밖으로
삐져나온 음료수 병 안쪽에 맥주병 2개가 더
들어가 있는 믿지 못할 상황이 벌어져 부검의
마저 경악했다. .
피해자 윤금이씨.
그녀는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또래 여성들이
꿈꾸는 평범한 행복을 포기하고 고달프게 살아가던
가여운 젊은이였다.
시골 농촌 마을에서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나
가족의 사랑과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윤금이씨의 삶은 지독한 가난 끝에 얻은 병환으로
아버지가 사망한 17세부터 빗나가기 시작했다.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 윤금이씨는 공장을
전전하다, 고생만 하고 돈은 많이 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던 중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유흥업소에 취직하게 된다.
이후 흘러흘러 평택과 안정리 등 미군 부대 인근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새로운 삶을 일구겠다는
결심을 한 뒤 사건이 발생하기 얼마 전인 1992년
10월 초에 동두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월세 4만원짜리 문간방을 얻은 윤금이씨는 꽃도
팔고 구걸 행위도 하면서 가능하면 술과 웃음과
몸은 팔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고 먹고살기 위해 주말이면 다시
미군 클럽에 나가 미군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양색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사건 전날 밤 고인의 행적을 탐문하던
의정부경찰서 형사들은 윤금이씨가 술에 잔뜩
취한 채 백인 미군 병사의 부축과 도움을 받아
귀가했고, 귀가하면서 두 사람이 집 근처 가게에
들러 삶은 계란 등을 사먹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해당 미군의 신원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한편, 시신을 부검하던 중 자궁 안에서 발견된
맥주병에서는 또렷한 지문이 발견되었고,
이 지문은 피해자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의자만 나타난다면 범인인지 여부를 밝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사건 발생 3일째인 10월31일
목격자들의 진술과 제보를 토대로 사건 전날
만취한 윤금이씨와 함께 귀가한 미군 병사가
주한 미군 제2사단 제20보병연대 5대대 본부중대
소속인 케네스 마클(Kenneth Markle·20세)
이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경찰은 곧바로 케네스
마클을 체포하고 그가 소지하고 있던 피 묻은
셔츠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케네스 마클의 지문은 시신의 자궁 안에서 발견된
맥주병에 찍힌 지문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하지만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검거된 피의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미군 병사’라는 점이었다.
미군의 법적 지위 및 미군 기지와 시설의 권리 등을
보장해주는 ‘주둔군지위협정을 체결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한국 경찰이 범죄 혐의로 체포한
미군 병사나 군속의 신병을 즉시 미군측에
인도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속이 필요한 경우 그 구금 장소는
‘미군 시설 내’로 한정하고 있어 이번 사건처럼
한국인 여성을 무참하게 살해한 중대한 흉악
범죄 사건의 피의자임에도 한국 경찰은 구속
수사를 할 수 없었다
미군 헌병대는 의정부경찰서에 피의자 케네스
마클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고, 한국 경찰은 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케네스 마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할 때마다 한국 경찰은 미군 부대를 방문해
복잡한 출입 절차를 거친 후 제한된 시간 동안,
미군 관계자 입회하에 조사를 해야했다.
사건 발생 4개월 만인 1993년 2월17일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케네스 마클 이병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이후 3월10일 2차 공판, 3월24일 3차 공판,
4월14일 선고 공판이 열려 재판부는 피고인
케네스 마클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을 그대로
인정해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매번 미군 헌병들에 의해 호위된 채 법정에 출두한
피고인 케네스 마클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기는커녕, 모든 증거와 목격 진술을 부인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
케네스 마클은 무기징역 형에 불복해 즉각 항소했다
1심 판결 후 5개월 만인 9월24일, 항소심 1차
공판이 열렸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이 이루어지기 한 달 전인 1993년 8월, 미국 정부는 윤금씨
유가족에게 7천100만원의 민사상 배상금을
지급했고 이 사실은 한국 법정에서의 항소심
재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원심보다
낮은 ‘징역 15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대법원 역시 15년형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건 발생 후 1년 6개월 만인
1994년 5월17일, 대한민국 정부로 그 신병이
인도되어 ‘천안소년교도소’에 마련된 외국인용
감방에 수감되었다.
천안소년교도소에 수감된 지 1년 만에 미국인
재소자와 함께 교도관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유리병을 집어던져 아크릴 창을 깨뜨리고
소화기를 집어들고는 교도관들을 향해 닥치는
대로 분사했다. 이 난동 행위로 징역 8개월을
추가로 선고받게 되었다
케네스 마클은 잔여 형기를 1년 여 앞둔
2006년 8월 가석방되었다.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의 결정이었다.
[12]
남산의십세애미년3끼 | 18:31 | 조회 891 |보배드림
[11]
조현수0814 | 18:14 | 조회 1683 |보배드림
[4]
링컨310 | 17:11 | 조회 1289 |보배드림
[2]
gjao | 18:07 | 조회 1029 |보배드림
[0]
리곰 | 18:02 | 조회 873 |보배드림
[4]
energystay | 18:00 | 조회 968 |보배드림
[12]
최진웅 | 17:59 | 조회 1774 |보배드림
[4]
energystay | 17:56 | 조회 1077 |보배드림
[0]
MonDieu | 17:52 | 조회 2028 |보배드림
[7]
체데크 | 17:50 | 조회 2209 |보배드림
[4]
Pikal | 17:36 | 조회 2003 |보배드림
[3]
고인 | 17:25 | 조회 1307 |보배드림
[4]
유대박맛집 | 17:15 | 조회 616 |보배드림
[8]
Saramim | 17:09 | 조회 1118 |보배드림
[23]
사랑그흔한말 | 17:11 | 조회 1427 |보배드림
가석방? 야이~~ 씨벌새끼들아!!
븅신 개새끼들 집단이 감형해주고 석방해주고.
저것들 가족은 꼭 당해봐야 일답게 하지.
마음이 아프다 저 새퀴 한국서 활보하고 다니는건 아니겠지
가석방도 해줄놈 한테 해줘야지 ㅁㅊ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