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하들이 국왕의 취미 생활을 반대할 때 자주 언급했던 중국의 황제
송나라(북송)의 황제인 휘종은 예술가적 기질이 매우 다분했던 황제였습니다.
휘종은 뛰어난 서예가이자 화가였고 궁정 예술과 수집에 깊이 관여하며 도교에 심취하고 대규모 문화 사업을 추진하여,
황제로서 국정을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예술적·종교적 관심 등 자신의 취미 생활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황제였습니다.
휘종이 예술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하여 그린 그림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휘종은 송나라의 만백성을 다스리는 황제이지 예술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황제보다는 예술가로 태어난 인생이었으면 더 좋았을 휘종은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큰 굴욕감과 치욕을 맛보는 일이 발생하고야 맙니다.
송나라는 문치주의에 너무 지나치게 올인하는 언밸런스한 국가여서 중국의 역대 왕조들 중에서도
국방력이 가장 허약한 국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송 휘종 때 여진족의 금나라를 뒤에서 몰래 배신 때리고 거란족의 요나라와 다시 손잡으려다가
결국에는 발각되고 이에 분노한 금나라에 의해 송나라의 수도인 카이펑(개봉)이 함락되며,
황제인 휘종이 포로로 사로잡힌 것은 물론, 화이허강(회하 또는 회수) 이북 지역의 영토까지 금나라에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휘종은 저런 굴욕을 겪으며 금나라의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층성 맹세까지 했고요. 이걸 '정강의 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 조선의 신하들은 국왕이 취미 생활에 너무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면
국왕으로서 국정을 돌보는데 소홀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국왕의 예술가적 기질을 매우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신하들은 국왕이 취미 생활에 깊게 빠져든다 싶으면 태클을 걸며
"전하, 송 휘종의 고사를 생각하시옵소서!"라고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며 견제를 했습니다.
오죽하면 조선에서는 국왕의 묘호로 휘종의 '휘'자를 흉참한 묘호라고 하여 종묘에 올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조선의 신하들은 왕이 폭군으로서의 행동을 하면 걸주,(하나라 걸왕, 은나라 주왕)
암군으로서의 행동을 하면 송 휘종의 고사를 들어서 반대했습니다.
태종 이방원도 신하들의 반대에 가장 골치 아파했던 것이 바로 자신의 취미 활동인 사냥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수 양제인 줄
걘 까놓고 말해 너무 성급해서 그렇지 다 필요한 일들이긴 했음
다만 마지막에 반란 터졌을때 멘헤라온게 돌이킬 수 없게 만든거였고.
거란의 금나라가 아니라 거란의 요나라
뭐 근데 왕이 지방이나 이런데 사냥핑계대고 와리가리하는 것도 개발에 도움이 되긴 해서.
왕 행차가 사실상 인프라 정비사업임. 저 시절엔.
문젠 인프라 정비사업인데 사업비를 안줄때가 있어서 문제긴 한데.
저새끼는 지 취미생활 한다고 지방에 수십만명 동원해서 강제노동 하게 해서 대규모 반란 터지게 한게 가장 문제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