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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구사 | 25/04/15 20:32 | 추천 29 | 조회 29

[유머] 오늘이 기일인 헤이그 특사 관련 위인. +29 [6]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70285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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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월 15일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명한 날이기도 한데

바로 타이타닉호가 14일 빙산에 충돌한 이후로 다음날 15일 새벽 2시경 침몰하고 만 날이다. 

그리고 이 침몰해가는 여객선에서 담담히 최후를 맞이한 의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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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인의 이름은 '윌리엄 스테드'(William T. Stead)이다.

그는 1849년 7월 5일 영국의 노섬벌랜드주 엠블레턴에서 목사의 아들로 탄생하였고, 그는 이미 5살부터 성경을 읽을 줄 알고 라틴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수재였다. 그는 1870년 진보성향의 '노선 에코' 언론사에 입사하였고 그의 언론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저 평범한 언론인이 아니었다. 


그는 최초로 신문과 잡지의 보도에 삽화를 삽입하는 보도 기법을 창시하였고 기자들이 조사를 위해 반드시 하게 되는 인터뷰 기사 형식을 고안해낸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사회적 문제에 상당히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진정한 평화주의자 이었고 인도주의자였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업적은 아동 매춘을 근절하는데 앞장 선 것이었다.


그는 만 13세밖에 되지 못한 소녀가 어떻게 매춘의 대상이 되는지 그 과정을 상술히 기록하였고 그 매춘이란 어둠에 끌려간 어린 아이들의 결말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호소하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사회에서는 아동 매춘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의회에서는 성년 기준을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함과 동시에 아동 성착취를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일을 해낸 윌리엄 스테드는 의외로 구한말 우리나라 역사에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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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종 의사의 사진)


일제가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을 마비 상태에 빠뜨리고 서서히 한반도의 민중을 노골적으로 노예화 하려는 흉계를 부리던 1907년.

고종 황제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로 몰래 파견하였다. 고종 황제는 이들에게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이 실로 일제의 흉계에 의하여 존망의 기로에 놓였고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은 무효임을 호소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노력과 개개인의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에 들어서지도 못하였다.

 

그러던 6월 30일 헤이그 일간지 'Courrier de la conference'는 특사들이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호소문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특별지의 편집자인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는 주석 기사에서 특사들의 신임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한국 대표들은 공식초청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윌리엄 스테드는 직접 이위종과의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그 인터뷰 내용의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윌리엄 스테드: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왜 이 평화 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시는겁니까?
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얼 하는 겁니까.
윌리엄 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으려 합니다.
이위종: 조약이요? 그렇다면 1905년 을사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윌리엄 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습니다.
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입니까? 여기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사실 총과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오?


이위종은 윌리엄 스테드와의 인터뷰에서 세계의 위선을 비판하였고 열렬한 주장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윌리엄 스테드는 이 인터뷰의 기사 제목을 '축제 때의 해골'로 삼았다. 스테드는 인터뷰 첫머리에서 '이집트인은 잔치상에 해골 하나를 놓아두는 관습이 있는데 그 목적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허무를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라고 설명하였다. 즉, '평화의 잔치'라 홍보하던 만국평화회의가 강대국들의 위선적인 잔치에 불과함을 꾸짖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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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 만평은 '루이스 라미마컬스'가 그렸는데 '평화의 문패를 걸고 있는 그 모임에 진정한 평화는 빠져있다.'라는 설명과 함께 입장도 하지 못한 헤이그 특사를 예수 그리스도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멸망을 목전에 둔 나라의 헤이그 특사에 관심을 가져주고 인터뷰를 통하여 그들의 주장을 널리 알린 윌리엄 스테드 덕분에 

적어도 대한제국의 현실을 여러 세계 사람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국제 기자단과의 기자간담회도 성사시켜 주었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헤이그에서의 헤이그 특사의 활동과 주장이 지금 우리 후손에게도 길이 남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기타 이러한 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그는 여러번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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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의로운 삶은 1912년 4월 15일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으니 그는 미국의 대통령 윌리엄 태프트의 요청으로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뉴옥으로 향하는 타이타닉호에 몸을 실었다. 그는 밤늦게 까지 그가 관심있어하던 강령술과 고대 미라의 저주에 관하여 신나게 대화를 나누었고 10시 30분에 잠에 들었다.


그리고 배가 빙산에 부딪힌 뒤 윌리엄 스테드는 직접 바깥으로 나와서 아이와 여자가 구명정에 탑승하는 것을 열심히 도왔다. 그리고 그는 정당한 그의 것이었던 구명 조끼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흡연실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의연히 배에 남기로 한 다른 신사들과 함께 독서하다가타이타닉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였다. 그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윌리엄 스테드가 바다에서 잔해에 매달려 있었으나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고 전하였다. 


그는 사후에서도 위대한 언론인으로 존경받았고 뉴옥 센트럴 파크에 그의 기념 청동 부조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고향에는 그의 이름을 딴 길이 생기기도 하였으니 같은 외국인 독립 유공자로서 헤이그 특사와 관련되어 있는 '호머 헐버트'의 이야기도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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