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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정사 삼국지 : 관우전 전체 번역 +38 [23]

루리웹 원문링크 https://m.ruliweb.com/best/board/300143/read/69460598

《關羽傳》 번역


1. 關羽의 출신과 劉備와의 관계

관우(關羽)의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본래 자는 장생(長生)으로 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이다. 죄를 짓고 도망하여 탁군(?郡)으로 갔다. 선주(先主, 유비)가 향리에 모인 무리를 규합할 때, 관우와 장비가 함께 그를 도와 외적을 막았다. 선주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아 각각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유비는 두 사람과 함께 잠잘 때 같은 침상을 사용하였으며, 그들의 관계는 친형제와 같았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도 늘 유비를 따라 수행하며, 종일 서서 시중을 들었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피하지 않았다.


2. 曹操와 劉備의 呂布 토벌

《蜀記》에 따르면, 조공(曹公, 조조)이 유비와 함께 하비(下?)에서 여포(呂布)를 포위했을 때, 관우가 조공에게 건의하여 여포가 진의록(秦宜祿)을 구원 요청을 위해 보낼 때, 그의 아내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하였다. 조공이 이를 허락하였으나, 하비가 함락될 무렵 다시 조공에게 요청하자, 조공은 그녀가 아름다울 것이라 의심하고 먼저 사람을 보내 보게 한 후, 직접 그녀를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관우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 이야기는 《魏氏春秋》에서 전하는 내용과 다르지 않다. 이후 유비가 서주자사(徐州刺史) 거주(車?)를 기습하여 죽이고, 관우를 하비성(下?城)에 남겨 태수의 업무를 맡게 했다. 《魏書》에서는 이를 두고 "관우에게 서주(徐州)를 맡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3. 白馬 전투와 曹操의 대우

건안(建安)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원정을 떠나자 유비는 원소(袁紹)에게로 도망쳤다. 이후 조공이 관우를 사로잡아 예우하며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하고 극진히 대우하였다.

이때 원소는 대장군 안량(?良)을 보내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조공은 장요(張遼)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반격하도록 하였다. 관우는 안량의 깃발과 수레 덮개를 멀리서 보자, 말을 타고 적진을 뚫고 들어가 그를 창으로 찔러 목을 베고 돌아왔다. 원소의 장수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상대할 수 없었고, 결국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 이에 조공은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처음에 조공은 관우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가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장요에게 "그의 속마음을 떠보라"고 지시했다. 장요가 이에 대해 묻자, 관우는 한숨을 쉬며 "나는 조공이 나를 후대하는 것을 잘 알지만, 유비 장군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함께 죽기로 맹세하였다. 절대로 그를 배신할 수 없다. 나는 반드시 공을 세워 조공에게 보답한 후 떠날 것이다."라고 답했다.

장요가 이를 조공에게 전하자, 조공은 그의 의리를 인정했다. 《傅子》에 따르면, 장요는 이를 조공에게 보고할지 망설였으나, 결국 이를 보고하며 "군주는 아버지와 같고, 관우는 형제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조공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은 세상의 의로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관우는 안량을 죽여 공을 세운 후, 조공이 예상한 대로 떠나려 했다. 조공은 이를 알고도 그의 뜻을 존중하여 더욱 많은 보상을 내렸으나, 관우는 모두 봉인한 뒤 유비에게로 떠났다. 조공의 신하들은 그를 추격하려 했지만, 조공은 "그는 자신의 주군을 위해 떠나는 것이니 쫓지 말라."고 명령했다.

《臣松之》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공은 관우가 떠날 것을 알면서도 그의 뜻을 높이 평가하여 추격을 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모두 갖춘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조씨 가문의 훌륭한 행적이다."


4. 劉備와 다시 합류한 關羽

관우는 유비를 따라 유표(劉表)에게 갔다.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荊州)를 정복하자 유비는 번성(樊城)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동하며 관우에게 배 수백 척을 이끌고 강릉(江陵)에서 합류하도록 했다.

조공이 당양(當陽) 장판(長阪)까지 추격해오자, 유비는 한수(漢水) 방향으로 향했고, 마침 관우의 배와 만나 함께 하구(夏口)로 갔다.

《蜀記》에 따르면, 유비가 허도(許都)에 있을 때, 조공과 함께 사냥을 나간 적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흩어졌을 때, 관우가 유비에게 "조공을 죽이십시오."라고 권했으나, 유비는 따르지 않았다. 이후 하구에서 관우는 노여워하며 "그때 내 말을 들었다면 지금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유비는 "그때는 국가를 위해 그를 살려둔 것이고, 천도(天道)가 바른 자를 돕는다면 이것이 오히려 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臣松之》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유비는 이후 동승(董承) 등과 모의했으나, 일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만약 유비가 조공을 국가를 위해 살려둔 것이라면, 이러한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관우가 정말 조공을 죽이자고 권했고 유비가 거절한 것이라면, 조공이 친척과 측근이 많아 쉽게 제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


5. 關羽의 최후

건안(建安) 24년(219년),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는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되고, 부절과 월부(鉞斧)를 받았다. 그는 번성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했으며, 조공은 우금(于禁)을 보내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가을에 큰 비가 내려 한수가 범람하면서 우금의 군대는 전멸하였고, 우금은 항복하였다. 또한 관우는 장군 방덕(龐德)도 참수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명성이 중원에 울려 퍼졌고, 조공조차 허도(許都)를 옮기는 방안을 논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마의(司馬懿)와 장제(蔣濟)는 "관우가 세력을 키우면 손권(孫權)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니, 그를 자극하여 공격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결국 관우는 손권에게 배신당하여 포위당했고, 패주하다 임저(臨沮)에서 붙잡혀 아들 관평(關平)과 함께 처형당했다.



6. 關羽의 죽음과 후일담

관우가 사로잡힌 후, 손권(孫權)은 그를 살려두어 조조(曹操)와 유비(劉備)를 견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손권의 신하들은 "이리 새끼를 길러 두었다가는 훗날 반드시 화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예전에 관우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화를 불렀듯이, 지금 그를 살려둔다면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라고 간언했다. 결국 손권은 관우를 참수하였다.

《吳書》에 따르면, 손권은 장수 반장(潘璋)을 보내 관우의 퇴로를 차단하게 했고, 관우가 도착하자마자 즉시 참수하였다고 한다. 또한 임저(臨沮)에서 강릉(江陵)까지는 2~3백 리의 거리였으므로, 관우를 사로잡은 후 곧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둘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손권은 이후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었으며, 조조는 예우를 갖추어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7. 關羽의 사후 평가와 후손들

관우의 시호는 "장무후(壯繆侯)"로 추증되었다.

《蜀記》에 따르면, 관우가 번성(樊城)을 포위할 때 꿈에서 돼지가 자기 발을 무는 꿈을 꾸었고, 이를 아들 관평(關平)에게 이야기하며 "내가 올해 쇠퇴할 운명이라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였다.

《江表傳》에서는 관우가 《좌씨전(左氏傳)》을 즐겨 읽으며 외울 정도로 익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우의 아들 관흥(關興)의 자(字)는 안국(安國)으로,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제갈량(諸葛亮)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젊은 나이에 시중(侍中)과 중감군(中監軍)이 되었지만, 몇 년 후 요절하였다.

그의 아들 관통(關統)이 대를 이어 공주의 남편이 되었고, 호분중랑장(虎賁中?將)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역시 자손을 남기지 못하였으며, 관흥의 서자(庶子) 관이(關?)가 가문의 대를 이었다.

《蜀記》에 따르면, 방덕(龐德)의 아들 방회(龐會)는 종회(鍾會), 등애(鄧艾)와 함께 촉(蜀)을 공격하였고, 촉이 멸망한 후 관씨 가문을 완전히 멸족시켰다고 한다.


8. 關羽의 역사적 의미

관우는 용맹과 의리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조조조차 그의 충성을 인정하여 추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격은 강직하여 외교적 감각이 부족하였으며, 이로 인해 손권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후세 사람들은 그의 의로움을 칭송하였고, 결국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관제(關帝)"로 추앙받았다. 이는 후대에 관우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의리와 충성의 상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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