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다른 정권의 화폐가 손오 관할 구역에서 유통된 현상은 역사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촉한 화폐가 손오 관할 구역에서 차지하는 유통 지위가 상당히 두드러지는데, 출토된 수량과 분포된 기간, 지역적 범위가 손오 본국의 화폐를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촉전오용(촉한 화폐가 오나라에서 사용됨)”이라는 기이한 현상이 이전 연구에서 아직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고에서는 당시의 경제적?정치적 환경에 근거하여 “촉전오용”을 초보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첫째, 양국의 경제 펀더멘털에 달려 있었다. 오촉 양국의 경제 체제와 화폐 본위 제도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손오는 건국 이래 정치적으로 강동의 호강(豪强) 대족에 의존하여, 경제적으로 전(錢)과 백(帛: 비단)을 병행하는 이원적 체제하에 있었다. 세제상으로는 한대(漢代) 이래로 돈 위주의 인두세를 이어갔고, 하사품으로도 대부분 동전을 사용하였으며, 정부 운영과 시장 활동에서 화폐 수요가 비교적 많았다.
반면 촉한은 건국 이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제갈량은 국정을 주관한 이후 북벌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이른바 “군사(軍事)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 체제를 형성했다. 촉한 정권은 경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국 내 금속화폐 사용을 줄였고, 염철(鹽鐵) 전매와 촉금 무역에 의존하여 재정 수입을 얻는 쪽으로 경제 정책을 전환하였다. 또한 직물(布帛)과 식량 등 현물 상품이 점차 주요 지급 및 결제 수단이 되었으며, 금속화폐는 주로 민간의 보조적인 유통 및 대외 무역용 지불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삼국지?촉지》의 내용에 따르면, 263년 촉한이 멸망했을 때 호구와 국고의 재물을 철저하게 점검했는데, 국고에는 “쌀 40만여 곡, 금은 각 2천 근, 금(錦)과 기(綺), 채(彩)와 견(絹) 각 20만 필”이 있었으나 비축된 금속화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를 통해 당시 촉한 내에서 금속화폐의 유통 지위가 낮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객관적으로 촉한이 “여윳돈”으로 손오의 “쓸모 있는 물건”을 맞바꾸는, 공급과 수요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둘째, 양국의 화폐 규모가 반영되었다. 손오 정권은 236~246년에 대천오백, 대천당천 등의 화폐를 주조했을 뿐, 당시의 주화 기술의 제약과 시장의 저항이라는 요인 때문에 화폐의 규모나 유통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반면 촉한은 유비가 입촉한 시기(214)부터 직백오수를 주조하기 시작했고, 이후 잇따라 직일소전(直一小錢), 태평백전, 태평백금, 정평일백 등 여러 종류의 대전을 발행했다. 촉한의 화폐는 한대(漢代)의 오수전에 비해 분명하게 무게가 줄어들고 액면가가 지나치게 높은 현상이 나타나 촉한 정권이 자국 내 민중의 부를 빼앗는 수단이 되었음에도, 대외 무역의 지불 수단으로 정부가 강요하는 지나치게 높은 액면 가격과 감소한 무게는 무역 상대에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유통 가치는 동전의 무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시장에 새로 주조된 오수전과 손오 대전이 없는데 (금속화폐) 폐지를 거부당한 상황에서, 손오 지역의 경제 주체들은 분명히 이 금속화폐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셋째, 양국의 무역 관계가 반영되었다. 삼국시대에는 220~223년에 있었던, 동오의 형주 탈취와 복수를 위해 촉한이 “이릉 전투”를 벌인 것을 제외하고는, 촉한과 동오 양국 간에 비교적 양호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었다. 특히 유비 사후 제갈량과 촉한에서 정무를 주관하던 자들은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싸운다(聯吳抗魏)”라는 외교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후 전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간 민간 무역은 비교적 활발하였다. 동오 자체는 금속화폐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촉한 내에서는 화폐가 상대적으로 적게 사용되었기에, 왕래 무역에서 촉한의 화폐가 동오로 유입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오와 촉의 경계인 형주 지역(후베이 일대)에서 촉한의 화폐가 더 많이 유통되었다. 출토 기록을 보면, 후베이성 우창(武昌) 런자완(임가만, 任家?)의 황초 6년(227)[황초 6년은 225년, 황초 7년은 226년이므로, 앞의 서술은 저자의 오타로 추정됨- 역주] 시기 오묘(吳墓)에서 촉한의 화폐가 발견되었는데, 늦어도 이 시기에 오촉 양국 간 화폐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45년 후베이성 어저우(鄂州)의 신암(新庵) 모초(茅草) M2 오묘(吳墓)에서는 촉한의 화폐 3,522점이 출토되었는데, 역대 무덤 중 촉한의 동전이 가장 많이 나왔다. 촉한의 무덤과 저장고에서는 촉한의 주화와 한대(漢代)의 옛 화폐만 발견되었고 동오의 주화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오촉 양국의 밀접한 무역 관계와 금속화폐의 일방적인 흐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 ?翼, 「????的出土情??“蜀??用”?象」, 『?南文化』, 2019, 67~68쪽.
손오화폐경제는 돈과 천을 주요 국가적 결제수단이자 민간경제 유통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조위경제와 촉한경제가 아닌 동한 말기의 화폐경제와 일치한다. 손오는 한나라 때부터 돈 위주의 인두세(算頭稅, 이른바 계산부과구전)를 실시했고, 전세(田稅, 곡물포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비해 당시 중원지방에서는 남경여직의 생산기반이 무너지고 오수전(五??)이 주물되는 등 전란의 여파로 고정적이고 통일된 호조제가 실시되었으며, 이러한 호조조는 이후 일부 개조되어 서진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손오는 동산(동 광산)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화폐경제도 중원처럼 파괴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또한 손오는 남경여직정책을 계속하여 동한 이래의 기본세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손오는 각지의 자연환경에 따라 유연한 세제를 만들어 막대한 전비 수요에 대응하였다. 그 일환으로 국가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손오는 돈 위주의 인두세와 조세 외에 다양한 수요물자를 수시로 조달한다는 뜻이다. (그 중 적어도 일부는 관이 매입한 것이다.)
이 밖에 손오에는 한나라 때부터의 시세 등 상업상 관세가 있었다. 그 기본은 백전 단위로 한대의 시조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지만, 한제와 대체로 일치하는 점이 많다. 손오의 인구 통계는 일견 촉한의 군사 최우선형 경제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군사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비상근 관리와 비상근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손오의 부역제 및 병제는 거의 완전히 한제를 답습하고 거기에 병호제를 추가한 형태였다. 결과적으로 손오는 소득이나 지출 면에서 모두 동한(특히 동한 말) 제도의 계승자였다.
카키누마 요헤이 - 손오 화폐 경제의 구조와 특징.
당대 촉한의 경제는 전시 경제체제를 취하면서 내부적으로로 금속화폐 경제가 붕괴하고 물물교환 경제로 치환되었음.
반면 손오의 경우 손씨 정권이 세워진 이래 한나라에서부터 이어진 상업 네트워크를 온전히 보전하고 있었고 각지에서 개발과 경제발전이 있었던데다가 화폐를 통한 정부재정과 상업의 과정에서 화폐가 절찬리에 쓰였기에 화폐수요가 항시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던 것임.
그래서 촉이 화폐로 손오의 상업 네트워크에 기생하면서 손오의 물자를 촉 내부에선 거의 쓰이지 않게 된 화폐로 교환하는 무역체제가 성립되었던 것. 그 과정에서 촉이 매긴 명목상의 가치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고, 단지 화폐의 금속으로써의 가치만 인정했던 것.
전란을 피해버린 ㄷㄷ
루리야!
본문 내용 요약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