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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생트. | 11:25 | 추천 11 | 조회 461

혼인신고와 간단한 도시락과 마흔을 앞두고 서서 +130 [11]

오늘의유머 원문링크 https://m.todayhumor.co.kr/view.php?table=humorbest&no=1776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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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 올린지 만으로 4년 10개월만에 혼인신고를 했다. 

서류는 신년부터 준비해 작성해두었고 차일피일 일주일정도를 미루다 전화로 오늘 일 일찍 끝나니까 구청에 제출하러 가겠냐, 물었을 때 남편은 잠깐 말이 없었다. 나는 왜 막상 혼인신고 하려니까 쫄? 쫄?? 을 외쳤고 통화는 웃으면서 끝났다. 

가방도 없이 맨손에 서류를 담은 투명파일 하나 달랑 들고 쭐레쭐레 나갔다. 뭐 엄청 차려입거나 꾸밀 것도 없이. 간단하게 화장하고 렌즈는 꼈네 그래도. 그정도의 무게감으로 임하고 싶었다. 사실 쫄은 건 나였음으로. 

생각해보면 그랬다.
결혼식 자체는 이 행사를 무사히 그리고 책잡히지 않게 끝내야한다는, 
업무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가깝게 치뤄내느라 기혼의 부류에 편입된다는 소회를 느낄 참이 없었고 이제 유부녀구나 라는 말에도 그냥 별 다를 거 없을거라 웃어넘겼는데. 
결혼 후엔 좀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의 잣대가 뒤집어더라. 저녁에 나가기만 해도 남편 저녁은? 혼자 여행간다니까 남편이 허락해줘? 괜찮대? 라는 말이 당연하다는 듯 여기저기서 날아올 땐 당황스럽다가 나중엔 불쾌하기까지 했다. 악의가 없는 걸 아니까 앞에선 그냥 웃어넘겼지만.

저는 사지 멀쩡하고 자기 결정권이 있는 성인이고, 자립한 개인 대 개인으로 교제하고 서로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 노후를 함께하기로 약속한 제 반려는 밥도 못 차려먹는 배냇병신이 아닙니다만. 지금 2020년대 아닌가요 갑자기 사람들이 3,40년 전으로 돌아갔나 왜이래?

오히려 시댁문제는 별거 아니었고 결혼하자마자 내 방부터 비운 아빠가 집에 갈 때마다 너 이렇게 자주와도 괜찮냐며 자고가지 말라고 하는… 본가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지는 것도 좀 놀라웠다.
워낙 자유롭게 살아와서 그런지, 한순간에 가치관을 재정립하진 못하겠더라. 제법 술도 퍼마시고 한탄도 하고 분노도 토로하고 그러면서 천천히 기혼의 삶에 편입되어 갔다. 결혼한지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분노하고 있었으면 그건 혼자 살아야지 뭐. 그러기엔 기혼의 꿀도 꽤 삼삼하긴 했다. 마음껏 예뻐하고 예쁨받는 건 물론이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깨알같이 부동산도 늘려가고 작은 사업들도 벌려보고 미래도 계획하고.
밥상 차리고 치우는 걸 상대가 당연히 여기면 빡치지만 요리하는 건 원래도 싫어하지 않았고, 정말 다행히 둘다 정리정돈에 좀 느슨한 편이라 결혼식 직전에 터진 허리 디스크로 계속 고생중이어도 마음은 편했다. 꼭 깨끗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야한다는 강박이나 불안은 없었으므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 5년에 가깝게 큰 싸움 없이 나름 알콩달콩 잘 살았다. 


그런데 막상 혼인신고를 하려니까 와 심란하더라.

깊은 관계에 있는 남녀가 서로가 크게 변하는 걸 목도하는 순간이 보통 결혼 후와 출산 후인데 그 결혼 후에 해당하는 시점이 결혼식보다 혼인신고 시점이지 않을까. 식만 올리고 갈라서는 부부들도 많고 아이러니하게 그 부분이 내 결혼생활의 균형을 잡고 있었는데(언제든 갈라설 수 있으니 최선을 다하되 너무 매몰되진 말자, 이런 마음.)

뭐랄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느낌?

사실 돌이킬 수 없어진 지는 한참 되었는데 말야. 이미 서로가 없는 삶으로 돌아가면 절대 예전과 같을 순 없다는 걸 서로 알고 있는데.


혼인신고 하고 구청에서 걸어나오는데 남편이 여보, 라고 몇 번 불렀고 나는 장난처럼 자기야라고 대답했다. 여보라는 말은 아직 못하겠더라고. 
자기 전에 남편이 꼭 안으면서 혼인 신고를 하니 왠지 더 애틋하다고 하더라. 그날 나의 내면에 일어난 폭풍우가 좀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항상 안정적인 사랑과 존중으로 고저가 심한 내 너울을 가라앉혀준다.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



오늘은 야근한다고 해서 어제 감자샐러드에 구운 소세지 넣어 샌드위치 만들어두고 새벽배송으로 컵스프 오게 주문해두었다. 추운 날엔 따뜻한 국물이 있어야지. 

아침에 마침 눈이 뜨였길래 종종거리며 도시락거리 챙겨 문앞에서 배웅하고 사부작거리다 이 글을 쓴다.



나는 당신을 20대의 끄트머리에 만나 30대 중반에 식을 올리고 40을 목전에 두고 혼인신고를 했다.


들개처럼 우울했던 20대처럼은 살수 없고
30대의 자신과 패기도 슬슬 저무는데
40대를 목전에 두고 이젠 뭘로 살아가려나, 또 평이하게 살아지겠지만

어쨌건 40대도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서서히 늙어가고 많이 웃고 많이 사랑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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